운명은 잔인하다.
[... 국화꽃입니다.]
나도 안다. 사실 멍청한 것은 나라는 것. 상황을 바꿀 용기도 의지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화풀이 같은 유치한 원망뿐이라는 것.
[니시우미에 온 것을 환영한다.]
결국은 모든 것이 내 마음의 문제였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네가 그 ‘스가와라’ 구나.]
그 이름의 무게가 나에게 너무 무겁다는 것 또한 사실이잖아.
태평양 어딘가, 미나미이오 화산섬의 마호토코로(魔法所).
위대한 네 명의 현자라 일컬어지는 아카테라 히노토, 아마히라 아오타카, 우미카츠 신이치, 모리오쿠 유타카가 설립한 동양 최고(最古)이자 유일의 학교. 그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나라 시대에까지 닿는 유구함을 자랑하는 역사와 그를 긍지로 여기는 자랑스러운 학생들로 학교의 이름은 드높았다.
하지만 그 교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그 학교의 인지(認知)를 허락받은 존재뿐.
마법사(魔法師)뿐이다.
열기를 뿜었던 것이 언제냐 싶게, 하늘은 하루하루 깊은 색을 덧입었다. 타는 듯이 세상을 달구던 기운이 식자마자 학교는 또 다른 열기로 들끓기 시작했다. 퀴디치 시즌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영국의 퀴디치 선수들에 의해 전승받은 이후, 퀴디치는 국민의 인기와 선망을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스포츠였다. 일본 마법사 세계의 탑승체계 자체를 빗자루로 바꿔버린 전대미문의 그 영향력은 학교 내에도 파다해서, 매해 9월에 시작하는 퀴디치 시즌이 다가올 때면 학교에는 다 지나간 여름이 다시 돌아오는가 싶을 정도의 열기가 흥청거렸다.
9월에 시작하는 마호토코로의 퀴디치 리그는 이제 일본 마법사 사회의 하나의 큰 이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열기가 유독 올해 치열한 것은, 올해의 퀴디치 팀이 마호토코로의 기나긴 역사 이래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멀티 플레이어 오이카와 토오루를 구심점으로 한 조직력의 히가시아카리. ‘괴동’이라는 이명이 더욱 친숙한 스타 플레이어,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니시우미. 본능의 수색꾼이라 불리는 히나타 쇼요의 미나미모리와 냉철한 이성의 팀 키타텐까지. 모두가 엄청난데도 누구 하나 특출나다 말하기 힘든, 높은 수준의 선수들. 그런 인재가 이 정도로 모인 해는 처음이었고 일본 마법사 사회는 그 놀라운 우연에 사상 최대의 관심을 표했다. 이번 리그 첫 경기에는 특별히 토요하시 텐구 선수들의 단체 관람이 예상되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학교 바깥의 관심은 학교 내의 열기에 비하면 비교조차 할 수 없었고, 학생들 사이의 호승심과 축제 분위기는 이미 정도를 넘어선 부분이 있었다.
이토록 퀴디치에 대한 학생들의 열정이 대단하다 보니, 현명하신 과거의 교수님 중 한 분께서 그 열정에 돌파구를 만들어 주려 어떤 제도를 생각해 냈다. 그것이 바로 전야제(前夜祭)였다. 퀴디치 시즌의 개막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호토코로의 모든 학생들이 모여 축제의 장을 여는 이 행사는 최초에 기획되었을 때만 해도 3일이었지만 지금은 약 보름간에 걸쳐 진행되는, 1년 중 가장 큰 교내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올해 퀴디치 시즌에 대한 정보 공유, 학생들 사이의 친목 도모, 그리고 힘든 연습에 지친 선수들의 짧은 휴식을 위한 여흥. 기숙사장과 퀴디치 주장을 비롯한 학생회의 모든 임원은 이 행사 하나를 위해 1년 동안 총력을 기울였다.
“그럼, 회의 잘 부탁해!”
“그래. 연습 힘내라.”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브이를 그려 보이는 오이카와를 배웅한 다이치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올해는 반드시 니시우미의 콧대를 눌러 버리겠다며 전의를 불태우는 퀴디치 팀 주장을 전야제 회의에 붙들어 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고 팀 또한 주장을 필요로 했다. 회의에 참석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다이치의 몫이 되었고 다이치는 그 역할에 수긍했다. 니시우미를 꺾어버리고 싶은 마음은 오이카와 혼자만의 마음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전야제 준비는 이제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보람 있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여름 내내 시달렸던 질긴 연습과 회의가 이제 겨우 끝을 보인다고 생각하니 평소 착실하다 평가받는 다이치마저 해방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곧 이어질 회의에서 자잘한 세부 사항을 조절하면 전야제까지는 일사천리. 그러면 미친 히포그리프처럼 날뛰고 싶어 안달이 난 이 분위기를 더 이상 억지로 통제할 필요도 없어지게 된다. 히가시아카리의 기숙사장, 사와무라 다이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회의실로 가던 다이치의 걸음이 멈추어 섰다. 회의실 앞에 선 자그만 은색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선 다정한 얼굴. 니시우미의 기숙사장, 스가와라 코우시였다. 앞에 선 매끄러운 까만 머리칼은, 카게야마였던가. 4학년이 되자마자 수색꾼의 자리를 따낸 천재. 초록빛의 퀴디치 경기복을 입고 선 커다란 인영과 짙은 녹색의 하오리를 입은 작은 그림자는 마주 서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는 끝물이었던 모양인지 카게야마는 가볍게 목례한 후 스가와라를 두고 멀어졌다. 그래서 다이치는 스가와라를 부를 작정이었다. 하지만, 올라오던 소리는 눈으로 보이는 장면에 힘을 잃고 거꾸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는 얼굴로 후배를 배웅하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스가와라의 얼굴에는 새까만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자신을 등지고 걸어가는 녹색의 경기복을 보는 표정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자신의 기숙사 대표 선수를 향한 자긍심 같은 것은 한 톨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그 눈에 담긴 감정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좋을까. 그것은 한 문장으로 표현하기 힘든 시커먼 덩어리였다. 미련, 질투, 그리고 자괴감. 그런 부(不)의 감정들이 모조리 모여 진창을 만든 어떤 것. 뒤돌아 가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 담긴 어둠에 다이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누군가의 무의식이 그토록 어두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챈 것처럼.
곧 스가와라는 빛을 잃은 눈동자를 가만히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 모습이 너무도 낯설고, 아팠다. 다이치는 자신이 어느새 하오리의 앞섶을 뜯어낼 것처럼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픈 곳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그 아픔이 몰려드는 곳은 제 가슴이었던 탓이었다. 통증이 몰려왔지만 다이치는 마치 눈을 붙여놓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장면에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어째서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황급히 기억을 더듬던 다이치의 머리를 벼락같이 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저 두 살 어린 선수가 그 자리를 쟁취하기 전, 니시우미 퀴디치 팀의 수색꾼을 맡았던 사람은 스가와라 코우시였다는 것을.
‘천재인걸.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잖아.’
그때의 스가와라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었다. 기숙사장 제안을 받은 참이기도 했고, 더 잘할 수 있는 선수가 그 자리를 맡는 것이 니시우미 퀴디치 팀을 위해서도 더욱 좋은 일이라고도 말했다. 애초에, 우리에게는 득점왕 우시와카쨩이 있다고? 이제 더 이기기 힘들어질걸? 기억 속에는 즐거운 듯 농담을 늘어놓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다이치는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 괜찮은 것이 아니야.
그저, 죽지 못해 버티는 것. 다른 방법이 없으니 견디고 서 있는 것일 뿐.
그것은 포기였다.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 기이할 정도로 명백했다. 저토록 선명히 절망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야 알아차린 자신이 우스웠다.
그 순간, 스가와라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의 그늘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금방 원래의 얼굴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다이치가 놀라움을 수습하는 것보다, 스가와라가 그를 발견하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그리고, 동그랗게 휘어지는 맑은 눈. 심장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 웃음을 다이치는 막지 못했다.
“다이치--!!”
그 웃음은, 마치 반칙처럼 혼란한 마음속을 전부 지워버리고 뚜렷하게 제 궤적을 남겼다. 이것 또한, 모를 수 없었다. 이제까지 몰랐던 것이 이상할 만큼, 명백했다.
좋아한다. 스가와라 코우시를.
[우리 셋이서 계속, 같이 있으면 좋겠어!!]
그것을 마음 깊이 바란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어렸던 날의 스가와라 코우시는, 얼마나 어리석었나. 어린아이는 자신의 소원이 얼마나 큰지 가늠하지 못한다. 그저 희망하는 것은 아이의 특권이자 또한 아둔함이었고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마법사 부모를 둔 모든 일본의 아이들은 예외 없이 7세가 되는 해, 바다제비의 방문을 받는다. 마호토코로 예비학교의 소집이다. 입학한 해를 기준으로 코타네, 와카메, 키미키, 츠보미의 4개 반으로 구성된 예비학교의 교육과정은 무언가를 배우는 과정이라기보다, 마법의 적성을 발현하는 것을 돕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대부분은 8살에서 10살 사이에 제 이름의 증명을 얻었고, 스가와라가 와카메를 벗어날 즈음이 되자 반의 모두가 어느 정도는 마법의 적성을 보였다.
[아직이니?]
다정한 어머니의 물음은 어느 순간부터 매일의 일과가 되었다. 어렸던 스가와라로서는 그 질문이 가진 저의를 파악하지 못했고 그저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그저 인자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뿐이었으니 더더욱, 몰랐다. 어렸던 날의 그 경험이 아니었다면, 영영 몰랐을 것이다.
폐쇄적이고 좁은 마법사 사회였고, 일본은 그중에서도 특히 마법사 인구가 적은 나라였다. 자연스럽게 ‘혈통’에 관한 것은 사람들 사이에 벽이 되어 서로를 구분 짓게 했다. 그리고 그 벽을 무기 삼아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아이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이노우에 마코토는 그중, 가장 악질에 속했다.
‘너, 아빠가 아라마호라며?’
이죽거리며 묻는 그 물음은 의도가 어찌나 명확했던지, 이노우에가 품은 못된 마음이 죄 비쳐 보였다. 의도치 않게 그 말을 듣게 된 스가와라마저 눈살을 찌푸릴 정도의 악의(惡意)였다.
그의 비뚤어진 질문을 받은 것은 사와무라 다이치였다. 작지만 전통 있는 사와무라 가문의 적통자. 어머니 홀로 자신을 키우신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무슨 문제 있어?’
‘문제 있지.’
비릿하게 웃은 이노우에의 옆에서 거구가 튀어나와 사와무라의 책상을 걷어찼다. 요란하게 책상이 넘어지고, 반 학생들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사와무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고요한 정적이 맴돌았다.
‘반경 여섯 척간(尺間)에 잡종이 있으면 기분이 더럽단 말이야.’
잡종이라는 단어 하나에 반 전체가 술렁였다. 그 단어는, 아라마호와 마법사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을 일컫는 단어 중에서도 가장 저급하고 배려심 없는 단어였다. 스가와라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과해.’
‘하?’
‘다이치를 잡종이라고 부른 것. 사과하라고.’
스가와라는 다이치를 가리고 서서 분노했다. 누군가가 곤경에 처했을 때 기꺼이 도우라 배웠고, 누군가를 함부로 모욕하지 말라고 배웠다. 그것이 가문의 긍지였고 마법이라는 상대적 우위를 점한 사람으로서의 배려였다.
스가와라는 노여움을 담아 상대를 바라보았고 그런 스가와라를 보던 이노우에가 비웃음을 한껏 담아 코웃음을 치며 손을 놀렸다. 세찬 바람이 얼굴 근처를 스치는가 싶더니, 스가와라는 어느새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웅크린 스가와라의 위로 이노우에의 조롱이 올라탔다.
‘아직 발현도 못 한 덜떨어진 핏줄 주제에, 그래도 스가와라라고.’
마법도 쓸 줄 모르는 반편이 주제에 어디서 귀족 흉내야. 이노우에의 말에는 마치 칼날이 돋아있는 것 같았다. 마법의 힘은 무기로써 휘두르며 위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발휘해야 하는 힘이라고 말하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올랐다. 저 오만한 녀석은 그분들의 가르침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는데. 나는 어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스가와라는 수치심과 분노가 한데 뒤엉켜 눈가로 잔뜩 몰려드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비겁하고 저열하고 멍청해서 상대해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 순간, 스가와라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리고 이노우에의 옆에 서 있던 거구들이 순식간에 공중에 거꾸로 매달리는 것이 보였다. 스가와라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선 그림자, 사와무라 다이치를 보았다.
‘이 이상 누군가를 조롱할 거라면 두고만 보고 있진 않을 거야.’
‘... 뭐, 야. 너...’
‘네 말대로라면, 나는 마법 좀 쓰는 잡종 새끼니까.’
손속에 사정은 두지 않을게. 너는 마법 잘 쓰는 귀족님이시잖아?
스가와라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웃는 얼굴이 그토록 서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이치는 청량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뒤에 도사린 분노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이노우에의 덩치 큰 친구들은 어느새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버둥대고 있었고, 이노우에의 얼굴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웃는 다이치와 질린 이노우에의 얼굴이 뚜렷한 대비를 이루며 사나운 기세를 더해가던 순간이었다.
‘... 다이치, 그만해.’
스가와라가 다이치의 손을 잡았다. 시비를 건 것은 분명 이노우에 쪽이지만, 공포에 질린 것 또한 이노우에였고 이 이상 일이 커진다면 다이치 또한 선생님의 문책을 피하기 어려울 터였다.
스가와라의 얼굴을 돌아보던 다이치는 곧 숨을 내쉬고 힘을 풀었다. 바닥으로 우렁찬 소리를 내며 떨어진 이노우에의 덩치 큰 친구들과 이노우에는 잘못 빨아 오그라든 세탁물처럼 쭈그러진 모양으로 교실 구석까지 밀려났다.
‘... 발현도 못 한, 덜떨어진 핏줄이 부탁해서 그만둔 거야.’
감사한 줄 알아. 한 줌도 식지 않은 분노가 그대로 담긴 마지막 말은 듣는 사람이 누구라도 뒤통수가 쭈뼛 설 듯했다. 이노우에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고 다이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쓰러진 책상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의 전의를 꺾었으니 더 겁박할 마음은 없었다.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않는 것이, 사와무라 가의 긍지였다.
스가와라도, 다이치 또한 굳이 일을 들쑤시려 들지 않았으므로 그 날의 다툼은 주동자인 이노우에의 침묵으로 평온하게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노우에가 던진 말은 스가와라의 머릿속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잊을만하면 되살아나곤 했다.
[발현도 하지 못한 덜떨어진 핏줄, 마법도 쓸 줄 모르는 반편이]
그 주제에 스가와라. 마법사 사회가 생겨날 무렵부터 존재해온 오래된 명가이자, 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가문. 태어난 지 10년 만에, 스가와라는 자신의 이름이 지독히 무겁다는 것을 알았다. 비범한 가문에서 태어난 평범한 사람. 그것이 자신이었고 그런 스가와라에게 노력으로 쫓아갈 수 없는 천부적인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잔혹한 일이었다. 마음이 조금씩 깎여나가며 시간이 지나갔다. 츠보미의 끝, 그리고 마호토코로에의 정식 입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껏 모두가 한 반이었던 예비학교 시절과는 다르게, 정식으로 마호토코로에 입학하게 되면 서로의 재능과 자질에 따라 네 개의 기숙사로 나뉘게 된다. 가능성의 히가시아카리, 존엄함의 니시우미. 자유의 미나미모리와 합리성의 키타텐. 아예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바꿔보려 애를 썼지만, 같은 기숙사에 들어가고 싶은 스가와라의 바람이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 카나메, 모니와!’
스가와라는 다가오는 순서에 막연한 공포감을 느끼며 무릎을 다시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같은 시기를 보낸 친구들은 하나둘 분홍빛 예복을 벗고 마호토코로 본관에 들어가기 위한 관문인 마법의 정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호토코로의 기숙사 배정식은 마법의 정원 가운데 있는 연못에서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마법의 정원으로 들어서며 예비학교 내내 입었던 분홍빛 예복을 벗고 새로운 하오리(はおり)를 받게 된다. 하오리로 갈아입고 인솔자를 따라 연못 위에 떠 있는 정자에 오르는 것이 배정식의 시작이었다. 정자와 연못의 신비한 힘은 새로운 마법사의 잠재력을 읽어내어 그 결과를 연못 위에 띄워 올린다. 학생마다 조금씩 다른 그 결과는 방위를 뜻하는 한자일 때도 있었고, 기숙사를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했다. 가끔은 아주 추상적인 색깔만을 띄우기도 했는데, 그것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이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마호토코로에 정식 입학하는 어린 마법사의 첫 시험이었다. 인솔 교사에게 자신이 본 것을 알리는 것으로 배정식은 마무리되고, 본관으로 통하는 정원의 문으로 향하면 각 기숙사장이 새로운 꼬마 마법사를 마중하러 나온다. 몇 번이고 들었던 배정식 순서를 속으로 복기하며 스가와라는 필사적으로 불안을 씹어 넘겼다. 하지만 쉼 없이 입안으로 차오르는 말이 갈 곳을 잃고 맴도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사히랑 다이치, 다 다른 기숙사로 헤어지게 되면 어떡하지?’
열한 살 코우시의 세계는 작고 좁았다. 무거운 가문의 이름을 짊어지고 깔려 죽지 않으려 노력하는 나날 중의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준 친구들을 잃기 싫은 것은 당연했다. 모두가 같은 기숙사에 가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스가와라에게 가장 간절했다. 아사히는 사람 좋게 웃으며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했고 다이치 또한 아사히와 별반 다르지 않은 위로를 해주었지만 스가와라의 마음은 달랐다.
키미키의 중반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마법적 재능을 개화한 늦된 스가와라의 핏줄에게 가문은 무관심했다. 비범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모자란 재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 노력을 다하는 나날. 그리고 겨우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고작인 작은 마음. 아이에게는 의지할 장소가 필요했다. 무릎을 끌어안은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스가.’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 스가와라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며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 다이치.’
‘괜찮아?’
단단한 까만 눈동자에 자신의 위태로운 얼굴이 비쳤다. 긴장과 공포가 뒤엉켜, 혼란으로 덩어리진 표정. 스가와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 다 같은 기숙사 못가면 어떡해?’
다이치는 그때에서야 스가와라가 가진 불안의 크기를 알아차렸다. 선하게 웃으며 영영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했던 아사히에게는 차마 내놓지 못했던 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있는 스가와라의 눈꼬리 끝에는 어느새 물기가 축축했다.
‘스가.’
‘나는, 다 같이…. 계속, 너희랑 같이 있고 싶어.’
맺혀있던 눈물이 하얀 볼 위로 굴렀다. 그것을 잠시 보던 다이치는 방금 태어난 병아리처럼 얕게 떠는 스가와라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곁에 붙어 앉는 온기에 커지는 스가와라의 눈동자를 보며 다이치는 굳게 말했다.
‘괜찮아, 스가.’
불안해도, 무서워도 괜찮아.
‘어디로 가더라도, 우리는 계속 친구야.’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아. 스가와라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환하게 웃는 다이치가 그 깜빡임을 따라 명멸했다. 일순 모든 것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것 같았다. 전까지 불안함과 혼란에 떨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고요해졌다. 다이치가 어쩌면 그 말에 마법을 걸었던 건 아닐까. 스가와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볼 위로 흘러내린 눈물을 훔쳤다.
‘코우시, 스가와라!’
‘아, 네 차례다.’
인솔 교사가 호명하는 소리에 스가와라는 놀라 일어섰다. 어느새 자신의 차례였다. 배 속이 끓는 듯했던 조금 전까지의 긴장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 고마워, 다이치.’
인솔 교사를 향해 걸어나가며 스가와라는 마지막으로 다이치를 향해 웃어보였다. 말 한 마디로 자신의 불안함을 지워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그리고 스가와라의 등을 향해 다이치가 외쳤다.
‘마호토코로에서 만나자, 스가!’